영화

[영화] <소공녀> -장르: 동화(판타지) (전고운, <소공녀>)

chui 2022. 3. 22. 20:09

 

나는 이 영화가 짜증났고, 미소가 짜증났다.

돈이 없어서 집을 버리고, 달팽이처럼 떠도는 소녀. 의 낭만화된 이미지.

나도 그게 마음에 들어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 그게 거슬릴 줄은 몰랐다.

그래, 취향도 인간 존엄의 문제 맞는데, 그 전에 인간한테는 생활이 있다. 나름의 스펙터클로 사용한 것 같은데, 무슨 이불까지 챙겨 다니면서 남산만한 짐을 끌고 다니는 미소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가난에 대한 유별난 사연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유럽 여행 하면서 돈 좀 아끼려고 짐 때문에 몇 배 고생했던, 내것만도 아닌 그런 얘기만 떠올려봐도. 에쎄고 디스고 나발이고 그런 짐 지고 옮겨다니는 거 일주일도 못 한다. 그 짐 가지고 여행해보세요. 그 어떤 골초와 애주가라도 금연금주 가능. 가난하다며 좋아하는 술은 왜 또 참이슬이 아니라 글렌피딕이 된 건지 사연이 궁금할 뿐.

그리고 그래서 취향을 좆는 심지 곧은 미소가 인간답게 살았는지? 따뜻하게 자지도 씻지도 못하고, 맘 편히 밥 한 끼 먹지 못하는 삶이, 밤마다 친구의 눈치를 보고, 애인과 돈 앞에서 쩔쩔매는 삶이 인간적인지? 친구들과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 뿐이지 미소의 삶도 불행하기는 매한가지다. 미소는 집이 없어서, 진정성을 상실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산다. 심지어 담배랑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만 있으면 된다더니, 결국 돈 때문에 남자친구와도 이별을 맞게 됐고. 누가 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데. 속물이 되느냐 가난뱅이로 남느냐가 흙수저의 삶이라면 애초부터 진퇴양난인데.

 

 세 명의 여자동창은 모두 직장, 가족, 육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취향의 세계와 결별한 채 살고 있고, 두 명의 남자동창은 여전히 기타를 치고 담배를 피우면서 자폐적으로 부서진 자아를 방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야말로 스놉(속물)이 되어 세속적 성공의 풍요를 누리기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근본적인 도덕 감정과 싸워가면서 강박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모습이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타자(사회)가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성찰이 없는 채로 그 욕망이 내면화된 후 자기 자신과의 갈등으로 전환되어 결국 자아의 빈곤과 자기 공격성으로 이어진 성과주체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 영화 <소공녀>에서 가난해도 취향을 지키겠다는 미소의 존엄함은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

서연주(2019). 흙수저의 진정성 지키기, N포세대의 감정 풍속도.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미소의 삶이 행복해 보인다면, 혹은 이 영화의 진정성을 찾을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이 영화가 '흙수저의 진정성 지키기'가 '일종의 판타지'임을 말하는, 의도된 착시물이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 기만을 친절하게 고지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지나치게 둔감한 관객인 탓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 영화는 가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사소한 핀트에서 어긋날 때가 무척 잦다. 그래서 정말 가난을 현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을 이렇게나 현실적으로 그렸어요!"라고 말하기 위해 몇몇 구체적인 장면에 집중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애초에 가난의 이면을 비출 때랑 속물적인 생활의 속내를 들여다볼 때랑은 시선의 온도부터 다르다. 없어도 유쾌해 따뜻해, 가난은 이렇게 구질구질하지만 그래도 결국 미소는 행복을 찾아가, 친구들은 좋아보이지만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이야, 미소는 그에 비하면 좌충우돌 소확행, 라는 식의. 포스터의 색감이나 결말부의 장면조차 낭만적인 분위기를 위해 소비된 '판타지적'인 무언가지, 이 영화가 판타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현실적'인 직설은 아니다. 이 영화가 판타지적이어도 판타지는 아닌 이유.

그래서 반감을 느꼈다. 특히 이 영화가 판타지임/여야 함을 짚으면서도, 그보다 미소의 진정성과 친구들의 속물성을 대비시키는 데 집중하는 위 인용글의 논지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미소의 삶은 누가 봐도 인간다운 그것이 아니고, 미소 본인의 기준에서조차 행복한 삶이 아니게 됐는데, 미소의 삶이 진정성 있고 사람다운 것이라는 듯한 뉘앙스가 글에 있다. 물론 스놉(snob)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은 타당하고 중요하다. 그런데 그 '하고 싶은 말'에 먹혀서 영화 자체가 어땠는지를 놓친 것 같다. 영화의 미진한 지점을 글쓴이도 느끼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맘에 들었던 게 있다면 '미소'를 잃지 않게 하는 영화의 유머감각. 그게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존엄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봄에 하자.."라는 대사 한 줄, 그게 이 영화를 (간신히) 좋은 영화로 남게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런 소소한 유머가 극 전반에 깔려 있어서 진심으로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또 여태 짜증난다고 투덜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미소라는 캐릭터를 미워할 수 있겠어. 캔디 서사는 미워해도 캔디를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거다. (판타지지만) 그 속 터지게 하는 답 없는 낙천성으로 당차게 살아가는 것도 대견하고, (로망이지만) 보헤미안 라이프를 대신 살아 주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도 있고. 이솜 배우 마스크를 내가 좋아하는 것도 있고. 그렇다. 애증의 영화가 될 듯.

 욕해놓고 민망한데, 돌고 돌아 이 영화 때문에 우리집엔 지금 글렌피딕이 있다. 난 분명 '애'증의 영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