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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개월 동안 잠에서 깨는 것은 정말 고통이었다.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걸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짐이 그런 것처럼 침대를 박차고 나가 미소와 함께 하루를 맞아 본 적이 없다. 너무 행복해하는 그를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바보들이나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다. 바보들이나 단순한 진실을 외면할 수 있을 거라고. 현재가 단순히 현재가 아니라는 차가운 진실을. 어제의 다음 날, 작년의 다음 해. 빠르게 혹은 천천히, 올 것은 오고야 만다. 그는 날 보고 웃으며 뺨에 키스해주곤 했었다.
고소득 전문직, 지식인, 중장년층 백인 남성이라는, 왠지 절대 뭔가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상실에 힘겨워하는 모습이 첫 번째 충격이었다면, 두 번째 충격은 그의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이 결국은 하나의 페르소나라는 점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것이 충격이었고, 그게 충격이라는 것도 충격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말 그대로 숨이 막혔다. 다시 보고 싶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단 당시 내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느리고 고요하고 희미한 화면과 음향이, 물론 그 화면과 음향의 물리적인 효과 때문만은 또 아니지만, 조지의 '물 속에 빠진 것 같은'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고 그래서 갑갑했다. 혹은 하루 동안 시간의 흐름을 영화 한 편으로 담아낸 방식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런 것이 종합되어 일일여삼추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그것도 다 결국 실체가 아니라 허상인 껍데기, 육체에 대한 공허한 공감이겠지만.
육체가 정신에 갇혀 있건 아니건, 다른 의미건, 나는 내 육체에 적층되는 정신이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쌓이는 게 늘 두렵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십육 년을 함께한 짐을 잃은 조지의 심정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라는 게 너무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연인보다 일찍 죽은 짐이 부럽고 자살하지 않거나 못하고도 먼저 죽은 조지가 부럽다.
디자이너 톰 포드의 작품답게, <싱글 맨>은 화면의 톤앤매너(tone and manner)를 이용해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살아갔던 조지를 설명하는 도입부에서는 채도를 낮추었으며, 죽은 연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채도를 높여 화사한 톤을 보여줬다. 조지의 심리에 따라 채도가 변하는 독특한 장면도 있다.
-씨네플레이
디자이너 출신 감독의 작품답게도 <싱글맨>은 잘 빠진 맞춤 정장 같은 감각적인 자태의 영화다. 색감, 각도, 간격 같은 미적 요소를 예민하게 활용한 세련된 미쟝센이 눈길을 끈다. 특히, <싱글맨>은 주인공의 감정 동요에 따라 화면에 채도를 덧입혀가며 온도를 만들어 나간다. 상실감에 황폐해진 조지의 심정처럼 무채색의 화면이 지배적인데, 주요한 순간에 이르면 인물의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게끔 연출했다.
-씨네21
어쨌거나 이 영화의 단점이라면 상실이 너무 잘 디자인되어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고 그건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끔찍한 것들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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