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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 먹은 게 기분 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 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192)

 "아직은 있어야 할 것 같아."
 -나쁜 일들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야.
 "나쁜 일들은 언제나 생겨."
 너한테도 생겼잖아. 은영은 강선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최대한 차분하게 마주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표정이 어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응." (198)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곤 나선 금방이었다.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199)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271)

 은영은 죽겠다,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실은 의욕이 넘치는 보건교사였다. 인표를 설득해 응급처치교육에 필요한 의료용 더미(dummy)를 중고로 업어 와서 다른 선생님들의 양해를 얻어 20분씩 수업을 했다. 20분이라 해도 전교를 돌아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강당에서 한꺼번에 하지 그러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가까이서 봐야 한다는 게 은영의 주장이었다. 기도 확보하는 법,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 흉골 압박 심마사지를 가르쳤는데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만이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멀미를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면 나아지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118)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월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소설이다. 한없이 친절하고 명랑하지만, 그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의 근거는 사실 그다지 경쾌하지 않은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경쾌하지 않은 현실을 없애지도 너무 전면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그의 세계로부터 은폐와 기만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다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 귀여운 진흙길 속에서 '경쾌하게' 찍힌 발자국들을 보며 조그만 희망과 용기, 그리고 즐거움만을 얻어 가는 것이다.

 

 안은영의 적은 그에게만 보이는 유령이나 귀신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대개 젤리나 달팽이, 해파리 따위의 형체와 질감을 가진 것으로 표현된다. 보는 눈에 따라 '물컹물컹'일 수도 있고, '말랑말랑'일 수도 있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름끼치는데 어떻게 보면 사랑스러운 대상들이다. 그러나 그 복합적인 악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본질은 아니다. 이 소설은 오히려 때로는 누군가의 악의에 찬 저주로, 때로는 그저 사춘기 학생의 성욕으로 그 괴물들을 흩어놓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너무 '다치지' 않고 안은영이 그들을 물리치는 '경쾌'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분명 이 세계에는 괴물이 가득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자주 지고, 도망치기도(『옥상에서 만나요』의 「효진」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자주 지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간혹 친절이 이기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가끔 이긴다. 그리고 늘 이기는 것보다 싸우는 사람이 너무 다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 싸움은 경쾌해질 수 있다.

 

 한편 이를 물리치기 위해 안은영이 사용하는 도구는 깔때기 칼이나 비비탄 총 등 조악한 장난감이다. 이는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라는 친구 강선의 말에서 비롯했다. 세상의 '악'에 대처하는, 또한/그러나 한 개인에 불과한 '선'인 은영을 보호하는 장치로 강선은 어린이용 장난감을 점지한 것이다. 크고 보편적인 악에 작은 개인의 선의가 맞서고, 이를 다시 더 보잘것없는(그렇다고 여겨지는) '어린이스러운 것'이 뒷받침한다.

 

 안은영이 싸울 때 쓸 '기(氣)'를 얻는 방식도 독특하다. 공장에서 제조되었을 장난감 총칼을 쓰면서 정작 그 힘은 인간의 정신·감정적 에너지에서 꾸어 온다. 때로는 명승지나 보양식 같은 오래된 도와 미신에, 때로는 치기 어린 연인들의 허울 좋은 약속에, 때로는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와 관련된 흰 밥의 이미지에 기댄다. 그것이 얼마만큼 진정성 있는지는 별로 상관 없다는 듯 이것저것 먹어치운다. 근본이라든가, 그러니까 성과 속의 구분은 그에게는 중요치 않다. 그의 장르가 그러하듯.

 

 그래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월드'의 정체성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추천사가 유난히 좋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 소설의 말랑하고 보드라운 지점에 찬사를 보낸다. 별 거 아닌 그 사랑스러움이 넘치게 고맙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넘치게 고맙더라도 이 세상이 실은 어쩌니 저쩌니 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늘어놓아선 안 되니까, 다들 안은영이 왜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만 산뜻하게, 발랄하게 떠든다. '칙칙'해져선 안 되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이해받지 않는 감각, 더 정확히 말하면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감각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비롯됐다. (...) 마치 이해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이, 그러니 이해받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너의 존재만으로도 너를 구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듯이. '그냥'이라는 이 쿨한 이해의 생략은 나를 늘 걷잡을 수 없이 뭉클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렇게 깊이 이해받으면서도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판타지 같은 위로를 정확히 안겨 주는 건지, 어쩌면 이렇게 번번이 경쾌하고 가벼운 손목 스냅으로 마음속 두터운 냉소의 벽을 와장창 깨뜨리는 묵직한 돌을 던질 수 있는 건지, 정세랑의 이 어마어마한 힘을 언제까지라도 따라가고 싶다. 
김혼비 에세이스트 / 이해받으며,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이 비장해지지 않고 하루하루 경쾌하게 전진하는 사람.
 그가 부지런히 창조한 세계에서 한 계절을 앓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늦지 않게 도착한다.
 김효은 기자 / 새로운 세계로의 점
​프

 마치 피곤할 때 마시는 자양강장제처럼, 날마다 챙겨 먹는 비타민제처럼, 힘들 때마다 찾는 오랜 친구처럼.
 이제는 급기야 정세랑이라는 이름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문방구 앞에 있는 뽑기 기계를 돌리듯 다음 장에는 무엇이 나올까 하는 긴장과 기대감으로 반나절 만에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오늘 뽑은 장난감들을 뿌듯하게 살펴보듯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이설 배우 /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안은영이 있는 세계는 그렇지 않은 세계와 천지 차이다. 그 세계에선 친절한 사람들이 이긴다. 초능력과 유머가 포함된 친절이다. 초능력과 유머로도 수습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다시 한다.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친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함부로 냉소하지 않고 좋은 것을 수호한다. 그런 이가 보건교사로 근무하면 세계가 아주 끔찍해지지는 않는다. 안은영에게는 세계 정화 능력이 있다.
 이슬아 작가 / 안은영 근처에서 얼쩡대고 싶다

 어쩌면 안은영은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말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자신처럼 속물적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말과 어울리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보건교사 안은영』의 가장 좋은 미덕이다. 다소 어수룩한 구석도 있지만, 안은영은 씩씩하게 다른 이들을 위해 애쓰며 싸운다.
 황인찬 시인 /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